1. 이이의 10만 양병설 주장의 핵심은 10만의 군대를 구성하자가 아니라 상비군 10만을 확보하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국경 경비의 개념만 있지 전면전이라던가, 국지전에 대한 대비는 없거든요.. 군적에 오른 병력의 수는 대략 30만 수준입니다.(세종 때에는 정군 보인 합쳐 100만 수준이죠.. ㅎㄷㄷ)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이 계획에 따라 병력 동원 자체는 잘 이루어 집니다. 문제는 동원이 이루어져도 제대로 활용이 되지 못했고 초동단계에서 털린 병력만 한 10만 정도 됩니다.(전부 죽진 않는다고 해도 심대한 인적 손실임에는 말할 것도 없죠..)
게다가 수도가 15일만에 털리는 바람에 궁궐이 불에 탔고 이에 따라 귀중한 문서들이 화재로 타게 됩니다. 선조가 왕성에서 도망치자 노비, 천인들이 자기들의 노비문서를 태울 목적으로 관공서를 습격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사직의 보존같은 거보다는 종과 노비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들이 글을 제대로 알리가 없으니 일단 종이에 뭐가 적혀 있으면 보이는 대로 태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의 저력은 이런 상황에서 무려 20만에 육박하는 동원능력을 보여 줍니다. -_-;; 명군 참전 직전에 조선이 동원하고 있던 병적에 오른 남성의 숫자는 17만명이었지요.. 요컨데 조선군이 인적자원이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조선 관료들도 알고 있었구요.
2. 임란 초기에 병진 원균과 뻘짓 박홍의 삽질로 인해서 초동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터졌고 이게 제승방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과 맞물려서 보름만에 수도가 함락당하는 황당한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코니시의 1군이 상륙한 시점에서 제승방략에 의해 소집된 경상도의 군대가 코니시 1군을 상대로 승리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혹자는 3포 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투력을 논하면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하는데.. 삼포 왜란당시 일본군 규모가 대략 2천에서 3천 수준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코니시의 1군의 병력은 최소 1만 5천.. 거의 2만에 달하는 대군이죠..(기록에 따르면 17,500명) 경상도에서 군대를 소집한다고 해도 많아야 5만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병력수에서야 앞섭니다만 우리는 용인에서 2천명도 안되는 일본군의 돌격 앞에 4만의 전라도 근왕병들이 무참하게 패한 사실도 알고 있죠.. 동시기의 조선 군대의 역량이 경상도가 전라도에 비해 극단적으로 높지 않은 한 이 경상도 소집군이 2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이기긴 매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부산, 동래, 다대포는 조선에서도 일본군의 공격의 첫 번째 목표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고(당연히) 이 지역 수비에는 많은 준비를 합니다. 정발만 해도 꽤 중앙에서 꽤 촉망받는 장수였습니다.(물론 정치적인 신뢰도 할 수 있는..-_-;;)
3. 제승방략 체제하의 문제점은 이미 웹에서도 여러차례 논의된 바 있고 심지어 유성룡도 제승방략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병력이 집결하고 장수를 파견하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초기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실제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소집된 군대는 허무하게 격파당합니다. 미처 중앙에서 사령관 부임 시키기 전에 패배한 것이죠.. 그래서 막상 이일이 60명을 데리고 신무기로 무장한 10만명의 왜군을 막는다는 전설이 생겼죠..-_-;;; 사실 저 60명은 수행원으로 봐야지 실제 싸우라고 보낸 군대가 아닙니다. 그가 지휘할 군대는 경상도와 충청도에 집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순식간에 박살나죠..
실제로는 이렇게 됩니다만 이일이나 신립이 충청-경상도 병력을 제대로 지휘했어도 (비록 일본에서 B급으로 평가받는다지만) 코니시가 이끄는 1군 상대로 이길지 확신할 수가 없죠.. 아쉽지만 신립도 탄금대에서 패배했습니다. 그 시점에서도 조선군의 일선 장수들은 왜군이 자기들이 아는 것처럼 육전에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용인전투 직전도 그렇고 신립이 탄금대에서 싸우기 전에도 그렇고 동원된 병력의 군사회의 장면에서는 적에 비해서 조선군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언급되고 탈영 문제, 낮은 사기가 자주 언급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조선군 사령관급 장수쯤 되면 현실 파악은 다 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_-;; 도망간 인간들 중 상당수는 어차피 오합지졸의 군대로 싸워봐야 못이기나 내 목숨이나 건지자는 애들도 상당수 였을 거 같군요..(이것은 제 추측..) 병력 자질이 이렇다 보니 하사관 계층이라도 좀 유능해야 어떻게든 군을 꾸릴텐데..
경악스런 이야기지만 조선군에는 기본적으로 초급장교-하사관이 아예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_-;; 보인, 갑사와 같은 무사계층은 있었지만 이들을 장교단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무과를 통해서 초급 장교들을 뽑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들은 진-관에 주둔하는 일종의 직업군대로서 종사하지 소집되는 군대에 하사관급 장교들은 아예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군대 자체가 기동전술을 수행할 여지가 아예 없습니다;;; 진지 방어전 같은 경우에는 제자리 사수하면서 돌을 던지던 활을 쏘던 창질을 하던 하겠습니다만 진형을 유지하면서 기민하게 기동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숙달되는 것이 아니죠..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보고 저것도 군대냐고 합니다만 애네들조차 각 도시국가마다 수십일 씩 모여서 훈련하고 그랬습니다. 대규모 기동훈련 한 번 안하는 조선군이 회전도 수 차례씩 치뤄본 일본군, 일본 장수를 상대로 제대로 이길리가 없지요.. 실제로 회전으로 붙어서 이겨본 역사가 없고..
4. 따라서 이이의 상시 10만명 정도를 확보하자는 이야기는 당시 변화하고 있던 조선의 안보현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포왜란, 을묘왜변 등에서 입증되었지만 기존의 진관체제로는 다수의 적이 내습했을 때 방어가 불가능하고 설령 제승방략으로 일단 침입한 병력이 많다면 모여서 치자는 것도 모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처가 쉽지 않죠.. 그러니 전략 예비대를 상비군으로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고..
단지 조선의 국력으로 10만명의 상비군 유지가 가능햐나가 중요한 관건인데.. 전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선이 그렇게까지 못사는 나라도 아니고.. 3정의 문란으로 여차저차 나라살림 어렵다고 해도 막상 임진왜란 당시 동원 수준을 보면 10만까지는 힘들다 해도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상시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면 병력의 재배치나(진관의 재조정) 도로망의 정비등으로(단순히 도로를 깐다기 보단 수군과 연계한 병력의 기동계획 등등.. 물류 자체를 이미 내륙 수운에 의존하는 특성상 병력 이동도 내륙 수운을 활용하면 매우 유용했을 겁니다.) 충분히 효과적인 전쟁 수행이 가능하도록 준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오히려 이이의 10만 양병설의 쟁점은 경제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변란(...)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네요.. 반대론 들어보면.. 대체로 돈 없다기 보단 그러다가 오히려 다른 문제(반란이죠..-_-;;)를 더 문제시 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돈을 안쓰느냐? 아닙니다. 사실 말이 전선 200척이지 판옥선급 전함 200척 뽑는거 결코 적은 돈이 아니며 거대한 인적자원을 소모합니다. 게다가 목조선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의외로 목조전함은 사고로 손실율이 크기도 하구요.. 이런 상황에서 100명 이상이 탑승하는 목조 대형함을 200척이나 돌리는 것은 결코 경제적으로 조선이 돈이 없서서 상시 육군을 키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고 봐야죠..
막상 임진왜란 직전에는 조선 정부 자체도 전쟁 준비에 열씸히였고 김수 같은 사람은 자기일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교체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죠. 고려시대에도 국제정세와 기본 전력을 잘못 잡는바람에 심하게 고생하기도 했지만(거란이건 몽골이건..) 조선도 사실 국제정세에 뒤처지다 보니까 막상 일본이 어떤 존재이고 일본군이 어떤 환경에 처했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 조선은 국경선 방어와 국지전, 소요사태라는 전략개념만 가지고 있었고 제승방략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개념의 확장시킨 대비전략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10만이 넘는 대부대로 내습해 왔을 때 (일선 장군들의 무능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작동했다고 해도 이 군대가 일본군과 붙어서 이길 수 있을지 매우 의문입니다.
5. 물론 원균과 박홍이 제 밥값을 했다면(판옥선의 전투력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초기단계에서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의 숫자는 1500척은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코니시 1군이 700척을 동원했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바다에서 한 번에 완전히 격멸하기는 힘에 부친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면 모르지만.. 다 치트공은 아니니까..ㅡ.ㅡ;;)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 초기부터 삐걱거렸을 것이고 뒤통수가 근지러운 한 쉽게 수도까지 내달리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수 만명에 달하는 왜군의 존재는 극히 위협적이고 꽤 힘들기는 하겠지만 경상도 일대에서 한 1~2년 치고받고 하다가 일본군이 물러나는 수순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해도 조선의 지상군의 취약함 때문에 꽤나 고생했을 거라는데는 의심의 여지는 없지요..(게다가 이 상황이 되면 공-수가 바뀌는데.. 임진왜란 말기에 일본식 성에 대한 조선군의 공세기록은 꽤나 참담합니다. )
ps. 사실 조선에서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지방으로 보내는 장수는 대체로 능력보다는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소요가 발생하면 그 때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해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선조 이전부터의 일종의 관례라고 해야할지, 운영 지침 같은 것이었죠..-_-;;
게다가 수도가 15일만에 털리는 바람에 궁궐이 불에 탔고 이에 따라 귀중한 문서들이 화재로 타게 됩니다. 선조가 왕성에서 도망치자 노비, 천인들이 자기들의 노비문서를 태울 목적으로 관공서를 습격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사직의 보존같은 거보다는 종과 노비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들이 글을 제대로 알리가 없으니 일단 종이에 뭐가 적혀 있으면 보이는 대로 태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조선의 저력은 이런 상황에서 무려 20만에 육박하는 동원능력을 보여 줍니다. -_-;; 명군 참전 직전에 조선이 동원하고 있던 병적에 오른 남성의 숫자는 17만명이었지요.. 요컨데 조선군이 인적자원이 부족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조선 관료들도 알고 있었구요.
2. 임란 초기에 병진 원균과 뻘짓 박홍의 삽질로 인해서 초동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터졌고 이게 제승방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약점과 맞물려서 보름만에 수도가 함락당하는 황당한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코니시의 1군이 상륙한 시점에서 제승방략에 의해 소집된 경상도의 군대가 코니시 1군을 상대로 승리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혹자는 3포 왜란 당시의 조선군의 전투력을 논하면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하는데.. 삼포 왜란당시 일본군 규모가 대략 2천에서 3천 수준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코니시의 1군의 병력은 최소 1만 5천.. 거의 2만에 달하는 대군이죠..(기록에 따르면 17,500명) 경상도에서 군대를 소집한다고 해도 많아야 5만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병력수에서야 앞섭니다만 우리는 용인에서 2천명도 안되는 일본군의 돌격 앞에 4만의 전라도 근왕병들이 무참하게 패한 사실도 알고 있죠.. 동시기의 조선 군대의 역량이 경상도가 전라도에 비해 극단적으로 높지 않은 한 이 경상도 소집군이 2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이기긴 매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부산, 동래, 다대포는 조선에서도 일본군의 공격의 첫 번째 목표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었고(당연히) 이 지역 수비에는 많은 준비를 합니다. 정발만 해도 꽤 중앙에서 꽤 촉망받는 장수였습니다.(물론 정치적인 신뢰도 할 수 있는..-_-;;)
3. 제승방략 체제하의 문제점은 이미 웹에서도 여러차례 논의된 바 있고 심지어 유성룡도 제승방략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병력이 집결하고 장수를 파견하는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초기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실제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소집된 군대는 허무하게 격파당합니다. 미처 중앙에서 사령관 부임 시키기 전에 패배한 것이죠.. 그래서 막상 이일이 60명을 데리고 신무기로 무장한 10만명의 왜군을 막는다는 전설이 생겼죠..-_-;;; 사실 저 60명은 수행원으로 봐야지 실제 싸우라고 보낸 군대가 아닙니다. 그가 지휘할 군대는 경상도와 충청도에 집결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순식간에 박살나죠..
실제로는 이렇게 됩니다만 이일이나 신립이 충청-경상도 병력을 제대로 지휘했어도 (비록 일본에서 B급으로 평가받는다지만) 코니시가 이끄는 1군 상대로 이길지 확신할 수가 없죠.. 아쉽지만 신립도 탄금대에서 패배했습니다. 그 시점에서도 조선군의 일선 장수들은 왜군이 자기들이 아는 것처럼 육전에 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용인전투 직전도 그렇고 신립이 탄금대에서 싸우기 전에도 그렇고 동원된 병력의 군사회의 장면에서는 적에 비해서 조선군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점이 계속 언급되고 탈영 문제, 낮은 사기가 자주 언급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조선군 사령관급 장수쯤 되면 현실 파악은 다 하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_-;; 도망간 인간들 중 상당수는 어차피 오합지졸의 군대로 싸워봐야 못이기나 내 목숨이나 건지자는 애들도 상당수 였을 거 같군요..(이것은 제 추측..) 병력 자질이 이렇다 보니 하사관 계층이라도 좀 유능해야 어떻게든 군을 꾸릴텐데..
경악스런 이야기지만 조선군에는 기본적으로 초급장교-하사관이 아예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_-;; 보인, 갑사와 같은 무사계층은 있었지만 이들을 장교단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무과를 통해서 초급 장교들을 뽑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들은 진-관에 주둔하는 일종의 직업군대로서 종사하지 소집되는 군대에 하사관급 장교들은 아예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군대 자체가 기동전술을 수행할 여지가 아예 없습니다;;; 진지 방어전 같은 경우에는 제자리 사수하면서 돌을 던지던 활을 쏘던 창질을 하던 하겠습니다만 진형을 유지하면서 기민하게 기동하는 것은 하루 이틀에 숙달되는 것이 아니죠..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보고 저것도 군대냐고 합니다만 애네들조차 각 도시국가마다 수십일 씩 모여서 훈련하고 그랬습니다. 대규모 기동훈련 한 번 안하는 조선군이 회전도 수 차례씩 치뤄본 일본군, 일본 장수를 상대로 제대로 이길리가 없지요.. 실제로 회전으로 붙어서 이겨본 역사가 없고..
4. 따라서 이이의 상시 10만명 정도를 확보하자는 이야기는 당시 변화하고 있던 조선의 안보현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포왜란, 을묘왜변 등에서 입증되었지만 기존의 진관체제로는 다수의 적이 내습했을 때 방어가 불가능하고 설령 제승방략으로 일단 침입한 병력이 많다면 모여서 치자는 것도 모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대처가 쉽지 않죠.. 그러니 전략 예비대를 상비군으로 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고..
단지 조선의 국력으로 10만명의 상비군 유지가 가능햐나가 중요한 관건인데.. 전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선이 그렇게까지 못사는 나라도 아니고.. 3정의 문란으로 여차저차 나라살림 어렵다고 해도 막상 임진왜란 당시 동원 수준을 보면 10만까지는 힘들다 해도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상시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면 병력의 재배치나(진관의 재조정) 도로망의 정비등으로(단순히 도로를 깐다기 보단 수군과 연계한 병력의 기동계획 등등.. 물류 자체를 이미 내륙 수운에 의존하는 특성상 병력 이동도 내륙 수운을 활용하면 매우 유용했을 겁니다.) 충분히 효과적인 전쟁 수행이 가능하도록 준비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오히려 이이의 10만 양병설의 쟁점은 경제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변란(...)이 더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네요.. 반대론 들어보면.. 대체로 돈 없다기 보단 그러다가 오히려 다른 문제(반란이죠..-_-;;)를 더 문제시 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돈을 안쓰느냐? 아닙니다. 사실 말이 전선 200척이지 판옥선급 전함 200척 뽑는거 결코 적은 돈이 아니며 거대한 인적자원을 소모합니다. 게다가 목조선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의외로 목조전함은 사고로 손실율이 크기도 하구요.. 이런 상황에서 100명 이상이 탑승하는 목조 대형함을 200척이나 돌리는 것은 결코 경제적으로 조선이 돈이 없서서 상시 육군을 키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고 봐야죠..
막상 임진왜란 직전에는 조선 정부 자체도 전쟁 준비에 열씸히였고 김수 같은 사람은 자기일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교체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죠. 고려시대에도 국제정세와 기본 전력을 잘못 잡는바람에 심하게 고생하기도 했지만(거란이건 몽골이건..) 조선도 사실 국제정세에 뒤처지다 보니까 막상 일본이 어떤 존재이고 일본군이 어떤 환경에 처했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은 없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 조선은 국경선 방어와 국지전, 소요사태라는 전략개념만 가지고 있었고 제승방략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개념의 확장시킨 대비전략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10만이 넘는 대부대로 내습해 왔을 때 (일선 장군들의 무능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작동했다고 해도 이 군대가 일본군과 붙어서 이길 수 있을지 매우 의문입니다.
5. 물론 원균과 박홍이 제 밥값을 했다면(판옥선의 전투력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해도 초기단계에서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의 숫자는 1500척은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코니시 1군이 700척을 동원했다고 하던데.. 이 정도면 바다에서 한 번에 완전히 격멸하기는 힘에 부친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이라면 모르지만.. 다 치트공은 아니니까..ㅡ.ㅡ;;)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 초기부터 삐걱거렸을 것이고 뒤통수가 근지러운 한 쉽게 수도까지 내달리지는 못했겠지요.. 그래도 수 만명에 달하는 왜군의 존재는 극히 위협적이고 꽤 힘들기는 하겠지만 경상도 일대에서 한 1~2년 치고받고 하다가 일본군이 물러나는 수순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이렇게 된다고 해도 조선의 지상군의 취약함 때문에 꽤나 고생했을 거라는데는 의심의 여지는 없지요..(게다가 이 상황이 되면 공-수가 바뀌는데.. 임진왜란 말기에 일본식 성에 대한 조선군의 공세기록은 꽤나 참담합니다. )
ps. 사실 조선에서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지방으로 보내는 장수는 대체로 능력보다는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소요가 발생하면 그 때 유능한 사람으로 교체해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선조 이전부터의 일종의 관례라고 해야할지, 운영 지침 같은 것이었죠..-_-;;
















덧글
왜란 당시에 조선땅에 일본군이 일본식 성을 쌓았었나 보군요.
행인1님 말씀대로, 임진왜란 말기에 가면 일본군은 전략을 변경하여 일단 점령지역이라도 계속 확보하자는 쪽으로 선회합니다. 그리고 왜성을 구축하는데 지금도 몇몇 지역에는 이런 왜성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군이 공세에 나서기는 했는데 결과는 신통치 않았죠..-_-;;
물론 그 와중에도 잘 싸운 부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전라병사 김준룡의 전라도 근왕병, 이완이 지휘한 황해도 포수들, 평안병사 유림이 지휘한 평안도 근왕병)
그나마 쉴드 쳐줄 수 있는 건 정묘년에는 왜란의 여파가 남아있었고 병자호란 때는 이괄의 난인데..ㅡ.ㅡ;; 임란 당시 조선군은 더 준비도 제대로한 군대라는 점에서 좀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공성전이야....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치트키가 있지요. 굶겨죽이기라고....(먼산)
말씀하신대로 저도 인정합니다만 박홍과 원균이 제대로 밥벌이만 했어도 고니시 1군은 경상도 일대에서 고착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 와중에라도 소집된 경상도의 조선군이 고니시를 상대로 정면대결해서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_-;; 아마 지엄한 왕명을 받들고 나가서 처발린 다음에 부랴부랴 다른 지역 부대까지 소집해서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말씀하신대로 최대한 수송로 차단해서 말려 죽이는 방법 밖에는 없겠죠..(해상봉쇄를 철저히 걸기에는.. 머릿수가 좀 부족하죠.. 13척으로 300척을 물리치신 치트공이 계십니다만 이걸 기준능력으로 놓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
조선군이 저렇게까지 골룸하게 된 것은 첫째로 태생이 군벌 장군이 반란으로 세운 나라다보니 지방의 군사통제권을 극도록 강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_-;; 그래서 장교단이 없었던 거구요.. 제승방략으로 넘어가기까지 150년 이상이 걸린 이유도 간단합니다. 군기동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던 거에요.. 반란 방지를 위해서.. 그나마 기존의 진관이 방어 못할 정도의 규모를 가진 적이 내습하니 응급처치로 나온게 진관 체제고.. 나중에 이이가 상비군을 대기시키자는 이야기는 결국 씹혔죠..
두 번째는 정치 외교적으로 평화를 달성해 버렸기 때문에 아무래도 군사기술 축적이란 측면에서 전면전 준비라는 것 자체가 그리 필요가 없어진 거죠.. 지금 안보 위협이 없는 거나 다름 없는 유럽 소국들(뭐 룩셈부르크라던가, 벨기에라던가..) 보면 군대의 준비태세는 좀 그렇고 그렇습니다.-_-;; 우리처럼 대군을 보유하지도 않고 1년에 몇 번씩 국가 규모로 기동훈련을 안하지요.. 매우 고리타분한 이야기지만 평화시기가 너무 길어지다보니 군사역량이 퇴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성종의 공격은 자력방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코웃음칠 정도고 그 뒤에도 몇년동안 중대규모 침공이 빈번하게 있지요. 성종의 침공과 마지막 소배압의 침공 사이에 도통이 임명되어 공격한것만 두번이 넘어갑니다. 9년동안 이정도로 싸우고도 막판 야전에서 그정도 실력 못보여주면 고려는 그야말로 한심X100 의 왕조가 되는 겁니다. 조선처럼 1년 싸우고 4~5년간 협상놀음한 것도 아니고.
2. 3차 때 20만은 고려 전지역에서 동원가능한 모든 인력을 다 뽑아낸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배압이 개경 인근으로 육박했을 때는 개경 내 수 백단위의 국왕의 호위무사 정도 밖에는 없었습니다. 타초곡기 선발대 잡는다고 이걸 쪼개서 다시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3. 3차 때 30만인데... 당장 요군의 보급전략을 보시면 거의 현지 조달입니다.(악명높은 타초곡기가 그것이죠..) 요군의 약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각 지역의 호족들은 정부군에 협조해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히 요군의 주요 침공로가 된 경기 북부의 호족들은 더욱 그러했죠..
서경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발해 출신의 호족들과 중앙 정보에서 파견나온 관리들, 서경의 토착 호족들간의 알력 때문에 내부적인 혼란이 발생 제대로 공성준비도 못하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_-;;
이전에 정리한 포스팅에서 언급했습니다만 고려와 같은 호족 중심의 분권적 시스템 하에서는 다소 우수한 무사진이 공급될지 모르나 실제로 전쟁에서 그닥 도움 주는 건 아니지요..
조선의 경우 중앙집권화와 완벽한 관료제 정착의 결과 고려가 30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한타에 말아먹으니까 당장 지방 귀족들이 왕을 잡을라고 들었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고 오히려 20여만 수준의 인력을 꾸준하게 동원합니다. 고려와 같은 체제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뭐 함경도 일대에서는 반란도 일어나고 그랬습니다만..)
그리고 현종의 경우 도망다니면서 타협을 보는게 고작이었지만 반란 자체는 순식간이 진압했죠. 게다가 왕 본인에게는 어떻게 못했어요.. 임해군과 순화군의 경우 대군이었기 때문에 좀 마킹이 덜한 부분도 있죠..(왕조국가에서는 왕과 대군의 차이는 큽니다.)
2. 조선군의 근왕병들이 무참하게 박살난 것은 맞지만 이것은 조선군 스스로가 체제 안정성을 위해서 군사력을 자체적으로 해체한 것이 큰 역할을 했지요.. 따라서 그런 대위기 속에서도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으며(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그 때문에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 미봉합 상태로 남았습니다만..) 지속적인 전쟁 수행이 가능했습니다.
3. 강조가 방심만 안했다면... 글세요.. 강조의 패배는 전형적인 유목민에게 패하는 정주군대의 모습입니다. 초전에 승리->이겼다고 착각->유목민들의 역습->전면적인 패주.. 높은 기동력과 낮은 방어구를 갖는 경우가 많은 유목민들은 공세가 어려우면 바로 포기하고 후퇴한 뒤에 다시 공격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반복공격의 습성을 잘 몰라서 크게 패한 경우가 굉장히 많지요..
4. 부족연맹, 지방 호족의 분권적 시스템은 아주 우수한 병사들과 양질의 무사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편성되어 다수의 전투를 경험한 군대는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맞죠.. 하지만 불안정한 체제 안정성은 그 군대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게 하거나 궁극적으로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하게 합니다.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뭐쥘 수 있었던 것은 광종 당시부터 있었던 과거제와 당장의 북방 유목민족의 잔인한 약탈을 피해야 하는 지방 호족들의 절박함(고려 왕조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1차로 타격을 받는 것도 그들이니까요..), 그리고 현종의 뛰어난 정치적, 행정적 능력이 맞물려서 지리적인 유리함을 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고려군이 잘 싸워서가 아닙니다. 결국 그 우수한 전투력은 요군에게 격파당하고 나서 고려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조선은 전투력이 부족한 군대나마(이것도 스스로 자기들이 어느정도 의도한 바가 크지만..) 패하고 나서 다시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차이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크지요..
ps. 조선 전기의 군대의 문제점은 저도 잘 알고 있고 단순히 동원된 병력의 질로 따지면 당연히 고려 당시의 군대가 더 우수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 군대가 최종적으로 전쟁에 승리를 담보하느냐는 물음표지요..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것은 군대의 질적인 우세만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ps2. 고려의 여요전쟁에서의 방어가 성공적이냐.. 성공적이지요.. 그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결국 역전까지 해냈으니.. 단지 그 전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구조적인 문제가 없었느냐 등등이 남는데 고려의 경우 조선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고, 현종이 결국 그걸 잘 극복해 냈다는 것은 핵심입니다.